배심제의 기원에 관해서는 법사학자들 사이에도 일치된 의견이 없으며 그 논거 또한 일정하지 않다. 즉 기원전 5세기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기원후 5세기의 아테네로 보는 입장도 있다. 다만 대체로 공통되는 견해는 현대형 배심제의 모형을 11세기 내지 13세기 영국의 국왕재판소에서 찾는다는 점일 것이다.
기원전 아테네의 법원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전문법률가에 의한 판단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배심원의 재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는 기원전 4세기의 소크라테스(Socrates)에 대한 재판의 경우 501명의 이른바 배심원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아테네식의 이러한 재판제도는 그 뒤 로마를 거쳐 영국으로 이입되게 되었는바 당시 게르만적인 여러 재판제도가 통일적인 국왕재판소 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국적 재판제도의 한 방식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의 재판방식은 물론 근대적인 사법재판과는 그 방법을 달리하고 있었는데 절차상의 핵심은 입증방식에 있었으며 이 경우 입증자의 거증책임(burden of proof)도 근대적 관념으로 파악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특권적 성격으로 규정되어야 하겠다. 입증을 위한 선서 보조자(oath helper)는 대체로 12명 정도였는 바, 오늘날의 배심을 이의 연장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뒤 초기적 배심은 피고인의 근린(neighbor) 또는 동료(peers)로서 입증 및 사실 판단하게 되어 그 기능의 폭을 넓혀 가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 15세기는 배심 기능에 있어서 하나의 전기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 이후로는 전적으로 사실 사항의 판단과 결정만 하게 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배심제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17세기 말엽은 또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게 되는바, 이는 배심의 현대적 변용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법 절차상의 현대적인 인권보장기능이 구현된 제도로서의 배심제는 그 시발을 17세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먼(Simon)'과 '마셜(Marshall)'에 의하면 1689년 이후부터 형사사건에서의 배심은 국왕의 공소(the Crown is accusation)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되어 현대의 기본적 인권보장의 한 장치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형사 배심에 있어 검찰의 항소권이 영미에서 부인됨에 비추어 신체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적 인권에 대한 국가권력의 침해와 남용의 방지 기능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배심제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고 이는 이미 1689년경부터 제도화되었다는 의의를 가진다.
한편 이 같은 영국 배심제는 1607년 제임스 1세 때 미국 버지니아로 이식되어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최초로 시행되게 된다. 이 당시 식민지 버지니아의 배심은 12인제는 물론 13인, 14인 또는 24인 등으로 다양한 실험과정을 거쳤는바, 많은 경우, 이 같은 식민기간 중의 배심제는 국왕의 권능에 대한 반발의 보루로서 기능을 하였고 이는 그 뒤 독립 후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이 배심제에 대하여 가진 애착 내지 선호 경향의 이유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독립 이전 제1차 대륙 의회의 선언문에서도 배심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열거되었고 그 뒤 헌법의 제정과 동시에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제3조 제2항, 증보 제5조, 제6조 및 제7조에서 이를 보장하게 되었다.
이렇듯이 배심제의 미국적인 변용의 기반에는 식민모국의 국왕의 권능에 대한 도전 및 사법절차를 포함하는 정치과정에 있어 시민적 참여기회의 신장을 구현하려는 정치이념이 깔려 있으며 더욱 직접적으로 국왕재판소의 법관을 이른바 괴뢰 법관 심한 불 신관이 그 배경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데 도그빌(Alexis de Tocqueville)'은 또 다른 연관에서 배심제를 관찰했었다. 즉 그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배심제는 피치자 내지 피치자의 일부가 사법절차를 담당하게 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공화정의 표징을 이루며 사회발전의 한 방향을 제시했다고 보았다.
데 도그빌은 영국의 배심이 주로 귀족계급으로 구성되어 왔기 때문에 그 기능 또한 이를 반영하는 반면 미국의 경우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배심은 국민주권과 보편적 선거권의 또 다른 제도적 표현으로 파악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미국 연방헌법의 제정으로부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약 60여년간 배심제의 역할은 괄목할만하였다. 남북전쟁의 발발 배경은 여러 시각에서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 중 최소의 하나는 배심제와 그 역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북부의 배심들은 노예의 도피를 방조한 자들에 대한 처벌과정에서 계속해서 무죄 평결을 내림으로써 사실 방 연방 도피 노예인 법(Federal Fugitive Slave Law)을 유명무실하게 하고 무효화시키는 결과가 되었었다. 이처럼 부당하거나 바람직스럽지 못한 입법의 기능적 개폐는 배심들에 의해 행해짐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금주 입법(Prohibition Laws)에 대한 배심 평결의 경향이나 특히 1960년대 및 1970년대의 격변기에서 일련의 정치적 재판(Political Trials)에 의해 있어 배심의 기능은 농후해 법 교정적(corrective of law)인 것으로까지 발전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연방헌법 증보 제6조와 제7조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연방의 형사소송과 민사소송에서의 소배심 내지 공판배심을 채택하게끔 규정하고 있는바, 개별 주의 경우도 일정한 형태의 배심재판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고는 있으나 앞에서 열거한 연방헌법 조항이 주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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